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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할뿐 자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부인할뿐 육신이   숨을   쉬는   한   옛   자아를   죽일   수   없습니다 . 내   생각   내세우기를   항상   보류하고 주님의   말씀을   하루하루   의지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옛   자아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 부인하지만   옛   자아에   복종하거나   타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 롬   8:13) 라고   했습니다 . 성령에   잡힌바   되어   십자가   은혜에   매여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붙잡음으로써 내   육신의   하고자   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할뿐입니다 . 우리 안에 죄의 불씨가 있어 그 기운을 느끼지만  그 불이 커져 삶을 태워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용수철을   누르지   않으면   튀어   오르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내   몸이   육신의   생각들을   좇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   성숙해진다는   것은 옛   자아의   죄악된   습성을   더   잘   알고 말씀과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깨닫고 옛   자아와의   싸움에서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함으로써 육신의   소욕을   다스림으로써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익숙해진다는   것일뿐 육신의   소욕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   육신이   건강하고   힘이   넘치면 육신의   욕망이   더   커지고   죄도   잘   짓게  되고 아프면 내가 의지하던 그 무엇이 무너짐을 느껴 내 속에 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그대로 표출되어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구요. 육신이  

자유와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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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율법 인격적 복음이라는 것은 각자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게 된다 .  예수님에 대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서로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것처럼 각자의 삶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게 된다 .  갈라디아서  5 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셨다 . 우리의 삶의 다양한 상황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자유를 우리게 주신 것이다 .  그런데 ,  공동체의 삶 가운데 덕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잘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율법을 어기고 교회의 법을 어긴 것 자체로는 죄가 아니다 .   다만 우리가 그런 결정을 함에 있어서 마음에 분명 그것이 잘못하는 것이라는 생각 ( 말씀과 성령의 역사 ) 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했다는 그 부분이 죄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모든 규례로부터 자유롭지만 ,  그 자유를 실행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   자원함과   규율의   조화 자신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자율과 규율의 조화가 필요하다 .  그것은 공동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규율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머물 수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 율법 ’  혹은  ‘ 신앙생활 지침 ’  같은 것이다 .  그것은 그 사람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고 죄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다 .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보조바퀴 없이 타려고 한다면 자꾸 넘어져 다치게 되고 결국에는  “ 자전거는 위험하고 재미없어 ” 라고 말하며 포기하게 될 것이다 .  따라서 처음 예수를 알고 주님과 동행함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사람은 적절한 규율이 필요하다 .   만약 당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 영적생활의 지침 ’  이라는 보조바퀴가 필요하다 .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춘 적절한 보조바퀴를 거부하지 말라 .  그러나 ,  동시에 한가지 기억할 것이다 .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의

복음과 문화

   복음과   문화 한국문화 혹은 한국교회의 특징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획일적인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강요하는 경향이 강하다 .  성경  QT,  기도 ,  금식 ,  예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벗어나는 경우에는 믿음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  이러한 획일성으로 인해 복음와 문화를 구분하는 의식이 부족하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  문화적 요소에 대해서 너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문제이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문제이다 .  믿음의 고백은 마음 중심의 문제이고 마음의 생각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문화라는 형태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  믿음의 본질과 비본질이  " 구별 " 됨을 모두 동의할 것이나 그것을  " 구분 " 하는 것이 가능하며 효율적인가 하는 질문을 해봐야 한다 .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이 본질적 문제이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비본질적 문제라고 본다는 것이 어려운 점이다 .  "5 대 근본적 신앙  ( 성경의 무오성 ,  동정녀 탄생 .. 등등 ) " 에 대해서는 모든 개신교에서 본질적 문제라고 볼 것이다 .  그러나 ,  칼빈주의  5 대 교리는 어떠한가 ?  한국 장로교에서는 그것은 본질적 문제라고 하고 감리교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   교단의 교리는 본질적인 문제일수도 비본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는 중간지대의 것이다 .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 경배와 찬양 "  형태의 예배 양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을 본다 .  오늘날의 문화적 흐름을 적절히 수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  그러나 ,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미국의 몇몇 대형교회의 예배의 형태가 콘서트 중심으로 되어가는 것을 본다 .  회중들은 안락한 극장식 의자에 앉아서 무대 위에서 펼쳐지지는 음악과 강연을 즐

믿음: 인간이 신의 영역을 인식하는 방법

   믿음이라는   것의   속성 ·           믿음은 검증될 수 없는 삶의 영역으로 나아갈 때 어떤 인격체를 신뢰하겠다는 의지의 결단이다 ·           믿음이 필요한 상황 혹은 믿음의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때는 우리가 삶가운데  “ 불안한 미지의 영역 ” 을 만나는 때이다 .   행복을 담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영역이 존재하는 상황에 우리가 놓일 때 우리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때이다 .  예를 들어 아이가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가는데 그곳에서 과연 좋은 교회를 선택하며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불확실하며 어떤 방법으로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 ·           우리의 삶에  “ 불안한 미지의 영역 ” 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하게 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  신분의 문제 ,  장래 진로의 문제 ,  자녀의 문제 ,  노후 대책 ,  건강의 문제 등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불안한 미지의 영역들이 참으로 많다 . ·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이러한 불안한 미지의 영역을 줄이기 위한 방향으로 노력하고 그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삶의 진로를 선택한다 .  보험상품으로 해결될 수 있으면 보험을 들기도 하고 ,  운동을 시작해서 노후에 건강으로 고생할 확률을 줄이려고 하기도 한다 . ·           이러한 삶의 방식이 나쁜 것이 아니다 .  문제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몰려올 때 그 속에 함몰되어 삶의 우선순위를 잊어버리게 되며 ,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삶의 모든 것이 거기에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노예생활이다 . ·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한 미지의 영역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크게 세가지이다 . o     그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내게 허용된 것 그 이상으로 삶을 소모하며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 .  내게 주어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  다른 말로 하면 ,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면 내 삶은 실패한 것이고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