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배경과 여성 안수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배경과 여성 안수에 대하여
오늘날 많은 교단들은 여성 안수를 허용하여 장로나 목사로 세우는 반면 몇몇 교단은 여성안수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 허용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교회에서의 여성 역할의 제한이 그 당시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여성안수를 용인해야 하는가? 바울은 21세기 문화적 상황에서 여성안수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본 발제에서는 그 당시 신약시대의 배경을 리뷰한 다음, 바울이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금지한 성경의 본문들을 해석하면서 금지의 이유들을 찾아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여성안수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신약시대의 사회환경과 여성의 모습
신약시대의 사회경제환경
1세기의 지중해 연안지역은 농경사회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작농 혹은 농노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 아래의 삶을 살았다. 농사라는 이들의 산업활동은 토지에서 이루어지므로 90%
이상의 사람들은 농촌지역에 살았으며 농사이외에는 약간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산업이나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상업이나 금융활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물품들은 자급자족하였으며 기본적인 경제활동의 단위는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가정이었으며, 그 가정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구조였으며 소비하고 남은 것으로 다른
가정의 잉여 재화를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의 사회문제로서 토지의 과점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와 절대빈곤의 문제를 들 수 있겠다. 또한 그러한 계층의 고착화이다. 오직 농업이 주요한 산업활동이었기에 경제적
능력은 토지의 소유와 직결되어 있었기에 토지가 없는 빈곤층에서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곤과 억압의 문제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더 낮았으며 이로 인해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지중해 문화속에 있는 여성과 남성의 구별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는 계층적 구분이 명확했던
것처럼 사회적 역할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구분도 명확했다.
또한 인간의 기질에 대해서도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그러한 기질들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생각을 전제하였다. 예를 들어 강하고 용감하며 이성적인 것은 남성에게 속한 기질이고 약하고
두려워하며 감정적인 것은 여성에게 속한 기질이라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남성성으로 분류된 기질들이 기대되고
요구되었고 여자에게는 여성성으로 분류된 기질들이 요구된 것이다. 이러한 기질의 대립구조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서로 얽히어 나타나고 있다. 여성성으로 분류된 어떤 기질의 경우는 그 사람의 사회적 계층이나 직종에 따라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요구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노예의 경우 성별에 상관없이 여성성의 기질이 요구되었다.
애칠루스의 비극 아가멤논에 나오는 클레템네스트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지성과 남성성의 기질로 인해서 ‘남성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서
어떤 남자가 여성성으로 분류된 성향을 보인다면, 예를 들어 긴 머리와 같은, 그를 여성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회 특정 집단에 대한 윤리기준과
성별로 구분되는 기질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발견된다.
특별히 여성과 노예라는 한집단과 자유 남성 이라는 다른 집단을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술과 여자, 식탐을 즐기는 것은 자유인 남성에게
기대되는 것이 아니며, 이경우 ‘그의 욕망에 노예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술 중독이나 성적 무절제함은 여성들의 기질로 인식되었다.
자기 결단과 절제는 자유인 남성에게 요구되는 기질이었다. 고대 지중해 사회의 가치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러한 성구분적 통념은 그 당시 사회의 ‘명예와 수치’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그 당시 사회의 힘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영역
고대 지중해 사회에는 큰 영역와 작은 영역, 두 개의 영역이 있었는데
큰 것은 도시였고 작은 것은 집이었다. 남성은 공적인 사회 생활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여성은 작은 영역인
가정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맡는 구조였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가정 바깥의 일들에 대해서 관여하면
안되었고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투표권은 물론 발언권도 없었다. 하지만 여성들 중에서는 자신들의 남편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사도행전
25장에 나오는 아그립바왕의 동생(?) 버니게도 그러한 여인중 하나였다.
혹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편을 지원하고 출세하도록 아내가 나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간접적인 정치참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편의 성공이었다.
한편 종교활동에 있어서는 여사제나 무당과 같이 여인들의 활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남성들이 여사제를 선발하는 등 여성들에 대한 우월적 지위는 여전히 발견되었으며 여성들은 오직 하찮은
역할이나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로써만 참여하였다. 또한 남성들의 연회에는 여성들은 참석할 수 없었는데 참석한다면
그녀들은 기생들의 역할을 하였다.
가정의 영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역할이 구분되어 있으니 남성은 추위와 더위에 맞서서 들에서
일하며 그 거둔 수확물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음식와 의복을 마련하고 남편이 수확한 것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의 구분은 그들이 생각하길 신께서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통념적으로 주어진 이러한 역할에 반하는 행위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며 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가정이 아내가 머물러야 하는 장소였으며 또한 외부의 남성으로부터 지켜져야 하는 장소였다. 가정을 부양하기 위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여성이 산업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아내가 자신의
영역인 가정에 머무르는 것이 남편의 명예와 연결되었다.
상류계층의 부유한 여인들 중에서는 다른 사람을 후원하거나 돌보는 여인들이 있었으며 회당 운영을
돌봤던 유대 여인들도 있었다.여성의 돌보고 섬기는 성향이 이들의 사회 활동에서도 보여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하류계층의 여인들은 생계의 문제로 노동현장에 내몰리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초대교회에서의 여성의 모습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서 몇몇 여인이 있었음을 신약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정을 떠나있고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하기도 한 것은 ‘여성에
대한 통상적 이미지’와는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어떤 면에서 남성의 영역으로 내려오던 분야에 여성이 참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선포하고 가르치는 남성 제자들의 업무와는 다르게 섬기고 돌보며 필요를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 당시 사회적 배경에 근거하여 저자는 해석한다.
한편으로는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도 하게 되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 보았을때 그들을 창기로 오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세리와 같은 사회적으로
멸시당하는 계층들과도 식사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 당시 존재하는 계층적 성적인 차별에 의해 비판받고 도전받았을 것이다.
도시 기독교 공동체내에서의
여인들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인들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했는지 다음과 같이 저자는 정리한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많은 여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디아스포라 유대 회당과 관련이 있음을 본다.
또한 이름이 언급된 배부분의 여인들은 싱글이었다. 이는 오직 남성 (남편이나 아들)의 관계속에서 여인의 신분이 정해지던 사회적 통념과 반하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여인들이 대부분 노예였거나 노예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홀로된 여인들중에서 과부는 특별히 언급을 했다.
몇몇 여인들은 가정교회를 이끌었다. 여인들에 대해서는 뒤로 갈수록 두리뭉실하거나
부가적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도시지역 교회 공동체의 여성 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경우는 크게 두가지라로 저자는
예측한다. 디아스포라 회당을 통하여 연결이 되었고 또 하나는 온 가정의 회심을
통해서이다. 그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회당과 가정이 선교의 유일한 장소였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여인들의 사회적 계층은 주로 하류계층으로서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한 가정의 가장이나
작은 사업체의 소유주들이었다.
사역에서의 여성의 참여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남여 구분이 없었으며 성령의 임하심도 그러하였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데에 있어서 성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도 남여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갈라디아서 3:28은 인종의 차이나,
신분의 차이, 성별의 차이가 없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이다.
바울서신의 여러곳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서는 자유인과 노예의 신분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 영적 원리가 사회에서의 당장의 노예제도폐지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남여의 구별에 대해서도, 교회안에서 성령의 은사적 사역에 대해 남여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남여의 구분을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안에서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하나됨을 보여줌으로써 종말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하나됨을 세상가운데 선포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사도라는 직함을 가진 여성으로 유니아 (롬16:7)가 있으며 브리스가, 유오디아, 순두게는 바울이 동역자로 부르고 있다. 마리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등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수고하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롬 16:12). 이 여인들은 가정교회들을
세우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롬 16:1-2에서
바울이 천거하는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였다. 여성들은 또한 기도와 예언하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고전 11:5)
이와 같이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서 여성들도 복음을 전하거나 예언하는 것을 포함한 대부분의
은사적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여성 참여는 초대 교회의 형태가 대부분 가정 교회의 형태였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가정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된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그 당시의 남여를 구분하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더욱이 3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형태가 가정보다는 교회 건물에 모이게 되자 여성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성경의 본문들
여성이 기도할때 두건을 쓰는 문제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고전 11:6) 그 당시의 일반적 관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고귀한’ 여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가리었다. 또한
머리 가리개를 제거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고 해방된 신분임을 나타내었다. 바울의 관점에서 두건을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남성으로 행동하는 것과 같으며 이것은 성별에 따른 사회계층에 혼돈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반대로 긴 머리를 가진 남자는 남성성에 반한 모습으로써 금지한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권면한
것은 교회가 대외적으로 허물을 잡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 14:34) 여성들이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에 허용을 하고 있으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금하고 있다. 이는 예배에 우연히 참석한 믿지 않는 사람이 여성이 남성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에클레시아 (교회) 라는 것은 원래 정치적 토론이나 투표를 하기 위한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자유인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으며 여인들은 발언은 고사하고 참여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규범을 지키는 것이 남자의 명예를 지키고 여인의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교회 (에클레시아)’라고 불리는 모임에 우연히 참석하여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을 본다면 상당히 불편할 것이므로 바울은 그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대신 여인들은 가정에서 남편에게 물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통념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딤전 2:11-12). 딤전 2:9-15은 여자의 순종해야 함과 창조 순서에 따른 열등함을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권면을 지켜야 할
장소로 교회는 물론 특별히 공공장소와 가정로 상정하고 있다. 가정과 공공장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 다음에
위치한다는 사실에서 저자는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영역은 가정과 자녀를 다스리는 것에 국한된다는
문화적 통념에 근거하고 있다.
여성의 순종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감
1세기 말에 이르러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더욱 전통적인 여성상 (유대 전통과
그레코-로마 전통)으로 흐르게 되어 여성의 순종을 더욱 요청하는 것들이
목회서신들에게서 발견된다. 기존 사회적 통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서신들에 나타난 가정 조례 (household rules: 골 3:18 –
4:1, 엡 5:22-6:9)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단 여기에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도 있으며 이러한 순종과 사랑의 기준은 ‘주님’이시다. “주께 하듯이” “주께서 사랑하시듯.” 이러한 권면의 초점은 더이상 역할의 분담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담긴
의미이며 온 가족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게 된 이유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는 동일한 은사를 받았음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역할이 비교적 평등하게 허용되었는데 바울의 후기 서신으로 갈수록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제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외부
사회의 비판이 압력으로 작용하여 그 문화적 통념들을 교회 내부에 어느정도 적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함으로
좋은 본을 보이거나 (벧전 3:1-2) 나쁜 본을 보이지 않게 (디 2:5) 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더욱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여성의 사역 참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고 그 당시 그레코-로망 문화의 관습들을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대외적인 선한 영향력을 최대로 하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교회 공동체가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 위애서 로마 주류 사회로부터 문화적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바울이 교회 (에클레시아)에서 여자는 조용히 하라는 권면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만으로는 딛 2:2-8에서
여성들에게 부정적 기질을 전제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쇼트로프 (Shottroff)는 이러한 서신들의 저자들에게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어느정도의 여성혐오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의 경제적 능력의 향상과 더불어 교회에서의 여성의 평등한 은사적 활동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이 점점 회복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 나타난 세가지 고려사항
오늘날 오늘날 21세기 교회에서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바울이
그 당시 이 이슈를 대했던 판단 기준을 살펴보고, 동일한 기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세가지 원칙을 말할 수 있겠다. 갈 3:28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은 두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첫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되는 데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그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사역으로 섬길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고전 12:13이 말씀하는 바 성령으로 하나되었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두번째의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각지체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하나됨과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지만 그 차별이
없는 것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저해하는 경우에는 할 수 있으면 하나됨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세번째의 원리는
대체적으로 여성의 사역이나 역할이 제한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복음사경을 위해 문화적 코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선교적 목적에 따라 세상의 문화적 코드를 어느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는
그 당시의 문화와는 다르게 여성들의 참여가 가능했지만 선교적 목적에 따라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 머리에 두건을 쓰거나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함 – 공동체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의 목적을
위해 여성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을 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외의 경우에는 여성의 사역참여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고 본다. 다만 이 세가지 중에서 우선순위는 공동체의 하나됨, 문화적 코드, 여성의 사역참여의 순으로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여성안수
한국교회의 여성안수
세가지 고려사항
그러면 오늘날의
상황을 바울의 세가지 고려사항으로 정리해보자.
첫번째는 성경 진리에
대한 것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정말 남성과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합신교단을 제외하고는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합신교단의 입장에 따르면 바울이 여성의 역할을 제한한 것이 문화적 코드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창조질서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해석의 정당성에 대해 비평할수도 할 필요도 없으므로 넘어가도록
한다.
두번째 고려사항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됨이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여성안수에 대한 견해차이로 교회가 나누어 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성안수의 문제가 이단시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다르겠지만.
세번째 고려사항은
사회의 문화적 코드이다. 오늘날 문화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초대교회때와는 반대로 교회에서 여성안수를 거부한다면 사회적으로 복음전도에 걸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성안수가 무슨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해당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협이 가능한 이슈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론
남성과 여성은 그리스도안에서
동등하다는 진리와 교회의 하나됨, 그리고 복음 사역이라는 고려사항을 놓고 볼때 오늘날 여성안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성경은 여성 안수를
막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 사역을 위해 문화적 코드를 고려하면 허용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하지만 더 우선하는 고려사항인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여성안수를 허용할 수도 금지할 수도 있다. 여성안수의 문제로 교회가 나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교단 혹은 교회가 각자 정할 문제이며
본질의 문제가 아니므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각 교회 혹은 교단은 본문의 더 깊은 이해와 신학적
통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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