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에 관한 고찰
성경말씀의 이중적 특성
· 말씀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말씀이 인격적이라는 말은 말씀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은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유한, 타락)로 인해 절대적인 하나님(무한, 거룩)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높이로 계시하시기 전에는 말이다. 그것이 성경 말씀이며 그 하이라이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말은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 같은 성경말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과연 진리는 하나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분 이시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서술은 서로 상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적 존재적 한계성으로 인해서
· 성경말씀은, 하나님(절대적, 객관적)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사건을 경험한 선지자들(상대적, 주관적)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는 저자의 인간적 특성(문법적 실수, 문체)등도 나타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말씀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말씀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객관적 특성과 동시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그 말씀을 깨닫고 삶의 적용을 통해서 그것을 확증해가는 주관적 특성을 가진다.
· 따라서, 성경말씀에 대해 주관성을 부인하는 시도는 잘못된 성경해석을 가져온다. 그러한 오류중의 하나가 말씀에 대한 탈인격화이다. 말씀의 인격적 특성을 경시하고 말씀을 철학적 지식으로 접근하는 시도를 많이 하게 된다. 성경말씀을 절대적 논리체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영지주의와 비슷한 접근이다. 말씀을 지식적 가르침으로 전달하려는 시도가 그렇다.
성경해석의 어려움
· 다양한 성경해석. 성경말씀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인해 다양한 성경해석이 존재하게 된다. 서로 다른 성경해석에 대해서 우리는 적정한 선에서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명백한 이단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냐하면, 말씀은 인격적이므로 성경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가 조금씩 다른 성경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 교단의 불가피성. 서로 다른 성경해석을 수용하면 되는데 왜 교단이 나누이게 되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를 들자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성경해석이 다른)과 너무 가까이서 한 교회를 이루며 신앙생활하기에는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논쟁하며 싸우는 것보다 서로 다른 교단을 이루며 자기가 믿는 바를 굳게 잡고 더 중요한 주님의 일(영혼구원)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단을 막기 위함이다. 성경해석의 주관성을 너무 강조하면 많은 이단이 나올 수 있고 또한 성경해석을 혼자서 하기에는 어려운 성도들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단이라는 울타리는 통해서 성경해석의 객관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다.
·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해석을 이끌어가신다. 성경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듯이 말씀의 해석은 성령의 조명으로야 가능하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엡1). 또한 교회를 통해서 성경해석이 완성되어 간다. 서로의 자극과 보완을 통해서 성경해석이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칼빈도 어거스틴도 그의 성경해석이 틀린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실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사용하신 일꾼이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경해석을 이끌어가시는 이유는 먼저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과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와 아직” (Already - not yet)
· 이미와 아직: 우리의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성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혹은 드러나지 않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육체가운데 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구원의 완성은 몸의 부활, 즉 영생에 이르는 천국의 몸을 입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의 성취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재 내 모습에 절망하기 보다는 장차 이루실 그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 ‘이미’는 주님의 하신 일에 기반한 것이라면 ‘아직’ 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성도가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개념을 포함한다. 성령께서 예수와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시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뤄가게 하신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아직’ 이루어야 할 미션의 시작을 말한다.
·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미와 아직’이라는 균형 혹은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만 주장하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죄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할 것이고, 아직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았다고만 말하면 우리는 죄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성경해석의 기준
· 성경해석에서의 신학의 필요성. 우리는 자신의 선입견이나 가치관, 경험이라는 틀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 신학은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한 틀을 제공하며 성경의 서로 충돌되는 여러 구절들을 해석하는 방법과 관점을 제시한다. 성경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관구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전체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다. 이것이 신학이다. 신학으로 어떤 본문의 내용을 강제로 해석하는 것은 그 본문의 내용을 왜곡하는 문제를 야기하지만, 신학을 거부하며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성경전체의 내용을 왜곡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적 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
·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이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 모든 말씀의 해석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성경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그 해석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모든 본문을 억지로 십자가 메시지로 연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약의 본문을 해석할 때에도 나의 해석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왜곡하고 희석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본문을 해석한 것인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 두 극단사이에서의 조화: 성경의 많은 가르침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유한한 피조물에게 무한하신 창조주가 다가와 진리를 선포하시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인간이 하나되신 성육신 사건. 죄의 육체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Already & not yet. 이러한 모순적 두 극단이 동시에 진리임을 알고 포용해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 조화되기 어려운 두 극단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계시되고 또한 복음이 선포되었다면, 그 복음을 바르게 해석하는 주체도 인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아보지 않으면 (쉬운 말로 말씀에 따라 살지 않으면) 모순처럼 들리는 성경의 여러 진리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Comments
Post a Comment